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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현장

베수비오 화산재가 남긴 빵 한 조각으로 복원한 로마의 일상

by gogoworld 2025. 1. 20.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이 폭발하면서 매몰한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에서 발굴된 빵 한 덩어리다.

그 열기에 탄화하면서 오븐에 있는 상태로 보존된 이 빵은 빵 굽는 사람 혹은 빵집 이름까지 새겨 놨다.

이 덩어리는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식혀둔 제빵 오븐에서 1930년 발견됐다.

화산 폭발이 몰고온 화쇄류pyroclastic flows는 놀랍게도 이 도시 일상을 그대로 보존하는 힘이 되었다. 

검게 변했지만 온전한 이 빵 한 덩어리는 현대 빵과 유사하며, 표면에 찍힌 글자는 제작자 이름을 드러낸다.

로마 제빵 역사를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빵은 모든 사회 계층이 소비하는 로마인 주요 식단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빵이 호화로운 식사와 함께 제공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빵이 주된 생계 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빵은 보리나 spelt로 만든 거칠고 어두운 빵부터 밀로 만든 고운 흰 빵에 이르기까지 품질과 종류가 다양했다.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이 빵은 반죽에 자연적으로 발효시킨 사워도우sourdough였다 추정한다.

로마의 빵 굽는 사람은 숙련된 장인이었으며, 그들의 빵 제조 기술은 일상 생활에서 이 음식의 중요성을 반영했다.

빵 굽는 사람은 종종 그 이름과 빵집 위치, 빵을 받는 사람을 나타내는 인장을 빵에 표시했다.

이러한 관행은 상업적 목적을 위한 브랜딩branding 역할과 정부가 빵을 제공할 때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 빵에는 사람 이름이 찍혔으니 이는 아마도 그 빵집을 소유했거나 그 빵집에서 일한 사람일 것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

빵을 굽는 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인구와 호화로운 빌라, 분주한 시장으로 유명한 해변 마을인 헤르쿨라네움에서 시작했다.

빵 굽는 사람은 일찍 일어나서 반죽을 준비하고, 발효시키고, 오븐에서 구웠을 것이다.

아마도 근처에 있는 화산이 곧 폭발할 것이라는 불길한 징조를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정오가 되자 베수비오 산은 엄청난 위력으로 폭발해 화산재 기둥과 녹은 암석을 공중으로 높이 뿜어냈다.

화쇄류가 산허리를 타고 내려와 과열된 화산 물질의 파도 속에 마을을 파묻자 헤르쿨라네움 사람들은 대응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강한 열은 음식, 가구, 심지어 건물 전체를 포함한 유기물을 탄화시켜 오늘날 현대 고고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상태로 보존했다.

이 빵의 보존은 단순한 과학적 경이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헤르쿨라네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인간성을 깊이 상기한다.

이 단순한 빵 덩어리는 반죽하는 제빵사부터 식탁에서 그것을 즐겼을 가족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일상 생활의 리듬으로 연결한다. 

빵은 또한 로마 사회의 고급 조직 수준을 조명한다.

빵집 이름을 빵에 찍는 관행은 당시의 상업 및 사회 구조를 말하며, 식품 생산의 책임과 추적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스템을 반영한다.

연구자들은 이 빵에 대한 연구를 통해 로마 제빵 기술, 사용된 곡물 유형, 빵의 영양 성분을 밝혀냈다.

이를 토대로 그 고대 요리법으로 로마 빵을 재현하기도 했다. 

이 작은 빵쪼가리 하나를 통해 우리는 멈춘 시간을 복원한다.

빵집의 분주한 활동부터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비극적인 사건까지 로마 제국의 일상 생활을 재생하는 것이다. 

이상은 아래 이야기에서 씰데 없는 부분은 적출해 버리고 정리한 것이다. 


https://vocal.media/history/a-slice-of-history-the-preserved-loaf-of-herculaneum?fbclid=IwY2xjawH7BiFleHRuA2FlbQIxMAABHRCxfFSFzNhMlM1FXqCjl5F-tUilqQPlM6THzYpX_Knhs81EFP7U7cvu2g_aem_BnYeT5TZnxu1r-OIF2RNQQ

A Slice of History: The Preserved Loaf of Herculaneum

Preserved History

vocal.media

 
저 빵집, 성심당 같은 위상이었을까?